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소회 두 번째
두리반에 대한 이야기
윕좌곽_자립음악가,
두리반에서 토요 자립음악회를 기획했던 일인
사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오늘(2011년 7월 6일), 두리반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순간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의 모든 기억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기분. 이 글을 쓰게 된 건 어떤 방식이 되었든 두리반에서의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 아니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 글은 다소 개인적인 글이 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처럼 재개발의 문제점들과 철거농성장에서의 힘든 나날들을 적고 싶었지만, 음악가로서 두리반에서 느낀 것들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음악가들은 어쩌다가 두리반과 연대하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아마츄어증폭기,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활동하는 한받은 자신의 음악활동 이외에 작지만 지속적인 발언을 통해서 홍대 음악씬의 문제점들에 대해 틈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홍대 거리와 클럽들을 순회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은 마니페스토를 외쳤고, 다소 도발적인 이름의 음모제라는 모임을 통해 의견을 공유하는 자리도 만들어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말로 풀어내고 있던 사이에, 머머스룸과 한받을 중심으로 서교지하보도에서의 공연이 시작된다. 다른 버스킹들과 다르게, 공연장처럼 ‘진식이의 2030’, ‘미스테리의 밤’ 등의 이름을 붙여서 시리즈로 공연을 진행했다.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어느 날은 공연을 하던 중에 민원이 들어와서 중단이 되기도 했지만, 피아노가 지하보도로 들어와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추운 겨울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기도 했다. 이러한 공연들이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아이러닉하긴 했지만, 자신들만의 장소를 찾아서 장비를 옮겨가며 공연을 진행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여름이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왔고, 철거 공지와 함께 지하보도는 사라졌다. 그리고 두리반이라는 칼국수 집이 강제철거에 반대해서 투쟁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머머스룸의 동민이 정기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겠냐며 두리반을 찾았고, 얼마 안 있어 ‘사막의 우물 두리반 토요 자립음악회(이후 자립음악회로 표기)’가 시작하게 된다. 음악가들은 두리반이 가지고 있는 위치(밀려나고 있는 위치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와 지금 음악가들이 가진 현실(홍대에서 밀려나는 음악가들)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음악으로써 두리반을 도와 줄 수 있는 공연으로 연대를 하기 시작한다. 홍대 앞에서 공연장들은 높은 월세에 밀려 하나둘 사라지고 있고, 음악가들도 합주비와 공연할 장소를 쉽게 찾지 못해 맞는 환경을 찾아 밀려나고 있고, 두리반도 자본이 밀고 오는 상황 앞에서 자신들의 우물을 파서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두리반에서 사람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 목소리를 듣고 두리반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어느 날, 인터넷에 자립음악회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공연 정보였다. 그 포스터엔 한받이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는데, 당시엔 두리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지만 그의 기도하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서 두리반 카페를 찾아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바로 마음을 결정하고, 자립음악회 4번째 공연에 당시 활동하던 밴드로 참가를 하게 되었다. 이게 나에게는 두리반을 찾아갔던 첫 경험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채림, 안종려 부부가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줬고, 다소 추운 날씨였지만 두리반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 있었다. 공연하기 전에 걱정하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공연을 보러 온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고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한받과 머머스룸의 동민, 회기동 단편선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이번 5월 1일이 메이데이 120주년인데, 51밴드가 모여서 두리반을 지지하는 공연, 페스티발을 하는 게 어떠냐.” 한받 특유의 농담이 담겨있는 특이하고 도발적인 제안이었다. 이것이 ‘뉴타운컬쳐파티 51+’의 시작이다.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어 동의했고, 이후 ‘뉴타운컬쳐파티 51+’의 기획을 도와주게 되었다. 다들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준비가 시작되자 놀랍게도 여러 사람들과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준비를 했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소식을 알렸다. 개인적으로도, 같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철거투쟁현장을 돕자는 음악 페스티발이 잘 될까 싶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었고, 놀라울 정도로 일은 잘 진행이 되었다. 다른 음악 페스티발들과 다르게 ‘철거 농성장 두리반 응원’, 폭넓게는 ‘재개발과 인디씬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될까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별 사고 없이 잘 끝났다. 원래 생각했던 51밴드를 넘어서 60개가 넘는 밴드가 참여했다. 혹자는 좀 더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요구했고, 개인적으론 더 많은 사람들이 두리반이라는 공간을 통해 재개발에 대해 재고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음악 페스티발이라는 형식으로 사람들이 두리반에 한번쯤 찾아와 그 공간을 기억하는 그 자체로도 성공이었지 않았나 싶다. 첫 ‘뉴타운컬쳐파티 51+’는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지만, 우리가 기대하던 것과 다르게 상황은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게 지나갔다.
가끔은 다급한 소식이 들려서 긴장을 하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두리반에 찾아가던 날들이 잦아지던 나는 정치색을 싫어하는 부모님과의 마찰로 잠시 집을 나오게 되고 자연스럽게 두리반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느 날 두리반 안에서 잠을 자는 동안 들려오는 퇴근시간 사람들의 발소리에 은근히 신경을 쓰다가 갑자기 생각하였다.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이 앞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 나도 이곳을 마주치지 않고, 이 안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저들처럼 그저 빠르게 지나가버리지 않았을까, 도시 안에서 우리는 무심코 많은 것을 눈감아버리고 있구나, 라는 생각. 이처럼 두리반에서 있는 시간도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두리반 안에서의 많은 활동가들과 만나게 되었고 자립음악회의 기획도 다른 친구들과 나누어서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게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사실 두리반에서 일어났던 다른 이벤트들도 같은 의미에서 자연스러웠다. 자발적으로 문을 열고 온 자들이 만들어나간 이벤트에 많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왔고, 이런 것들이 원동력이 되었다. 월요일엔 엄보컬, 김선수의 하늘지붕음악회, 화요일엔 푸른영상의 독립영화 상영회, 금요일엔 칼국수 음악회, 토요일엔 자립음악가들의 자립음악회가 두리반 농성이 시작하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하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유엔 우리는 용산이라는 공간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과 두리반이 위치한 홍대라는 곳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모든 일들이 매끈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통해 모든 일들을 진행했으며 이런 방식이 오히려 두리반만의 색깔을 보여주었다. 해가 지나고 2011년이 되었고, 두리반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중간 중간 안 좋은 상황들(한전과 마포구청이 두리반의 전기를 끊어버린 일)이 있어 발전기로 겨울을 보내고, 뜨거운 물을 넣은 페트병을 안고 잠에 들며, 추운 날씨에서도 발전기를 켜가며 공연을 진행해나갔다.
시간이 다시 ‘뉴타운컬쳐파티 51+’를 준비해야할 때로 돌아왔다. 작년만큼 이슈를 모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기 있다, 라는 것을 알리고 여전히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페스티발을 준비했다. 막상 당일에 비가 오는 악조건 속에서도 2번째 ‘뉴타운컬쳐파티 51+’는 잘 끝났다. 첫 회와 다르게 페스티발 전날 토론회를 진행했고 두리반에서 음악을 시작했던 음악가들이 ‘자립음악생산가모임’을 만들어서 발기식을 했다. 홍대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들만의 공간을 찾아 이동하던 이들이 두리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자립이라는 기치로 모여서 결국 이날 두리반에서 자립을 외쳤다. 페스티발이 끝나고 기다림은 계속 되었지만, 힘이 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문인들은 불킨낭독회과 정기적인 낭독회를 만들었고, 도시 안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미술그룹 리슨투더시티는 ‘도시영화제’를 포함해 두리반에서 많은 작업을 펼쳐냈고, 자칭 잉여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3층 강좌’를 만들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게 나누는 곳으로 두리반을 찾았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두리반을 찾았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지지하고 지키기 위해 공간을 찾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발적인 사람들의 참여가 빛이 났다. 그런 빛들이 도움이 된 것일까, 두리반 투쟁에 긍정적인 답이 나옴으로써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두리반을 얻을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도움이 되었다. 두리반 투쟁이 끝날 때쯤, 나도 가족과의 대화 끝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적고 보니 두리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단순한 나열로 보일 수 있지만, 이들이 해낸 일들은 단순히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연대였다. 다른 철거농성장과 확연히 달랐지만, 헛수고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일반화는 될 수 없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지속해온 것에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음악가로서 나는 공연을 기획했고 공연을 했지만, 그 안에서 많은 일을 하지는 못했다. 공연을 기획함으로써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미미한 효과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왔을 때 그들은 곧 두리반이 홍대의 다른 공연장들과는 다르고,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이 안에서 왜 생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누군가의 발언 혹은 안에 있는 소개글, 또는 공간 자체가 자신들을 말해준다). 누군가가 나에게 액티비즘적인 행동을 했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법에 가로막혀있는 현실 자체를 돌파하고 싶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음악으로 연대’하는 것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와서 그것들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이 모였고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런 것들이 두리반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나에게 다가오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강성으로 이루어진 단어들과 투쟁 현장에서의 힘든 점들도 적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 적고 나서, 지금 무너진 두리반 건물을 보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많은 일들이 일어난, 단순한 철거투쟁현장이 아닌, 누군가 말한 ‘사랑스러운’ 철거투쟁현장 두리반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삶의 한 부분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글을, 혹은 무너져내려가는 저 건물을 붙잡고 싶다. 토요일이 되면 두리반으로 가서 친구들과 공연을 준비하고 또 같이 보고, 가끔 마이크를 들고 유채림, 안종려 부부를 무대로 불러 두리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 그립다. 이 글을 정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많은 말을 썼고, 많은 말을 지웠다. 가끔은 그곳에서의 어떤 순간들이 떠올라 웃기도 했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는 마지막 문장을 써야겠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다. 한받씨가 마지막으로 두리반 앞에서 룸비니를 부르고 있다. “행복한 시간 아무것도 없는 거리, 그 거리를 두리 두리반 걷고 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말한다. “두리반에서 행복했던 시간들, 이제는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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