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와의 키스

- <안녕, 프란체스카>를 보며 육식에 대한 생각


정명화_lalata@hanmail.net, @your-myeong



1. 입 : 육식산업과 뱀파이어


  입은 가장 신적이며 동시에 가장 동물적이다. 하느님의 입은 “빛이 있으라”고 말하였지만 아담의 입은 사과를 삼켰다. 신은 언어를 말하지만 동물은 식욕과 성욕을 따른다. 그리고 인간은 둘 중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의 입은 말하는 동시에 먹는다. 두 개로 갈라진 입술은 이러한 딜레마를 증거한다. 신과 동물, 정신과 육체 사이의 간극. 이러한 간극은 대부분 인간문명의 근저에 놓여있다. 예를 들어 법과 집행자 사이의 간극. 공명정대한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라 언명했으나 대한민국 CEO 이명박은 가난한 자를 죽인다. 예를 들어 키스와 오럴 사이의 간극. 플라토닉은 순결한 정신의 고양을 꿈꾸지만 뜨거운 육체는 금지된 체위에서 흥분을 느끼기도 한다.


  육식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 육식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 놓여있다. 자연이란 먹고 먹히는 순환원리에 따라 제작되었지만, 문명 덕분에 인간은 먹이사슬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초원에서 인간은 크기도 작고 행동이 굼뜬 까닭에 곰이나 호랑이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지만, 도축장 안에서는 어떤 동물도 인간을 해칠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문명 쪽이 우세해졌다. 이제 우리는 고기를 먹기 위해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도, 죽음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구석기인은 멧돼지의 뜨거운 몸뚱이를 부여잡고 도끼를 내리찍었지만, 현대인은 이중 포장된 냉동육을 카트에 담는 것으로 저녁준비가 완료된다. 이때 인간의 모습은 극단적이다. 어떤 순간에는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지배할 수 있는 신으로 군림하지만(“돼지는 인간보다 지능이 낮대”), 어떤 순간에는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동물로 전락한다(“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만 해”). 육식산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성만 있는 신 ↔ 식욕만 있는 동물이라는 양극단을 오간다. 이렇게 인간은 신이자 동물, 정신이자 육체였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육식산업이 인간 존재에 초래하는 거대한 흠집이다.


  한편 인간을 잡아먹는 유일한 생명체는 뱀파이어다1). 그럼에도 인간은 뱀파이어에게 도저히 떨칠 수 없는 매혹을 느끼곤 했다2).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뱀파이어 프란체스카와 인간 이두일은 눈만 마주치면 서로를 물고 빤다. 둘의 사랑은 마치 언제든 피범벅이 될 수 있는 톰과 제리의 사랑과 같다. 인간과 뱀파이어가 사랑할 수 있다면, 인간과 소 혹은 인간과 돼지 역시 사랑할 수 있을까? 혹은 인간이 뱀파이어와 키스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동물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



2. “있음”에 대한 사랑 : 동물과 인간의 공통점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나에게 올여름은 <안녕 프란체스카>와 함께 시작되었다. 장마가 지나고 시즌2로 접어들자 프란체스카는 두일이를 사랑하게 되고, 나는 프란체스카를 사랑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종종 두일이를 돼지라 놀렸음에도, 나는 가끔 (프란체스카를 연기한) 배우 심혜진을 비호감이라 생각했음에도. 이런 전개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평소에 우리는 이상형과 정확히 반대되는 남자와 열렬히 연애하는 사람들을 많이 안다. 어딘가 못난 사람들이 누군가에겐 다정한 눈빛으로 껴안고 싶은 천사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나는 너의 외모/전과를 사랑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확실히 연인의 개별적인 특성과는 무관하다.


  사랑은 연인의 “있음”을 대상으로 한다. 연인을 소개할 때 잘 생겼다거나 머리가 좋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가 “있다”는 것 자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연인의 “있음”이란 연인의 옷 입는 스타일이나 대학 성적표와는 다르다. 그는 옷을 잘 입을 수도 “있고”, 남루할 수도 “있다”. 그는 A를 받을 수 “있고”, F만 받을 수도 “있다”. 스타일이나 성적표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이라면, “있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전자가 이 세계에서 실제로 발휘되는 모습이라면, 후자는 여러 개의 세계에 걸쳐서 존재하고 있는 잠재력까지 포함한다. 이 세계에서는 A로 나타났다가, 저 세계에서는 B로 출연하고, 어디서도 C는 보여주지 않는 나의 연인. “있음”은 A도 B도 C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험할 수 없고 대상화할 수도 없는 생생한 괴물처럼 남아있다. 마치 길을 걷고 있다가도 시어를 발견할 가능성을 가진 시인이나 잠을 자고 있어도 언제나 노래할 능력을 가진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결혼식에서 우리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언약한다. 그 말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남은 생)을 들여서 상상할 수 없는 연인의 다양한 모습(늙음, 추함까지 포함해서)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다. 잘날 수도 있고 못날 수도 있는 너의 미래를 사랑하겠다는 뜻이며, 네가 발휘할 미래의 수만 가지 가능성에다 나의 온몸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너의 존재를 경이로운 눈으로 내 삶에 끌어들인다. 그렇게 나는 너의 “있음”을 사랑한다.


  프란체스카와 두일이는 함께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첫째로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자신의 우연을 고정시켜 한 곳에 모여들겠다는 의지 때문이며, 둘째로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공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통점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뱀파이어와 인간,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사이에 공통점은 별로 없다. 프란체스카는 유럽에서 귀족생활을 했고, 두일이는 한국에서 백화점직원을 했다. 프란체스카는 500년을 뱀파이어 가족과 살았고, 두일이는 어른이 되고는 혼자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결국 둘의 공통점에서 비롯했다.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 현실성을 기초 짓는 가능성, 프란체스카와 두일이의 “있음”. “있음”의 견지에서 인간과 뱀파이어와 동물은 차이가 없다. 그렇게 “있음”은 인간과 다른 인간, 인간과 다른 동물이 공유하는 유일한 특성이다. 인간도, 뱀파이어도, 어린 노루나 거위 따위는 모두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인간인 나의 “있음”이 온전하다면 소, 닭, 돼지의 “있음”도 온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이 망각될 때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육식산업과 유태인 학살을 비겨 말했다3). 동물에게 이성이 없기 때문에 잡아먹는다는 생각과 유태인에게 나쁜 피가 흐르니 없애버리자는 생각. 둘은 모두 대상의 “있음”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인간에게 닭은 “닭다리”이고 소는 “소곱창”에 불과하듯, 독일인에게 유태인은 “나쁜 피”이자 “더러운 종족”에 불과하다. 한 생명을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곡해하고 축소시킨 형태로 인지하는 방식, 그를 통해 인간/독일인이 위대하고 순결한 독재자로 군림하는 방식. 이때 고기로 치환된 동물과 고기를 먹는 인간 사이, 열등인자로 치환된 유태인과 우등인자로 성립한 독일인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한 독일인 병사는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이 “수족관의 물고기” 같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완전히 다른 존재, 감정이입할 수 없는 존재, 온전한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릴 필요도, 죽임을 끔찍해할 이유도 없다.



3. 귤에 새겨진 사랑 :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


  분량내로 끝내야하니 이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앞에서 육식산업이 작동하는 논리 중 신적 부분(“인간은 감정과 이성을 가졌지만, 동물은 그런 게 없으므로 죽여도 괜찮아”)에 대해 반발했다면, 이제부터는 동물적 부분에 대해 반발하려 한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두일이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을 상징하는 음식은 귤이다. 기약도 없이 멀리 떠나는 프란체스카에게 두일이는 “입이 쓸 때 먹어”라며 귤 한 봉지를 건네준다. 사실 프란체스카는 뱀파이어인 까닭에, 비둘기, 족발, 선짓국 등 각종 동물성 단백질의 애호가이다. 그러나 어느 밤에 프란체스카는 사라진 아이가 그리워 오래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두일이는 프란체스카의 메마른 입술에 귤을 한 알 한 알 놓아주었다. 그렇게 그 밤의 기억은 귤빛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뱀파이어는 완연한 식물성인 귤조차 달디 단 사랑의 맛으로 간직한다.


  인간의 오감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은 단순히 뉴런세포의 신경자극으로 아름다움을 캐치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비너스의 형상이 달라지고, 나라에 따라 민요의 가락이 상이하듯이, 인간의 감각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배양되고 수정된다. 여섯 번째 감각인 육감이 작동하여 오감에 접착될 때,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본인의 미학을 갖게 되는 까닭이다. 이때 육감이란 “분석적인 사고에 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정신작용”으로서 단순히 미스테리한 감각이라기보다는 “이들 육감이라든가 영감도 결국은 고심한 인간의 힘의 성과이며, 본인 자신의 평소의 수업 ·연구 ·경험의 축적에서 나온다4)”. 이렇게 항상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경험 속에서 인간의 감각이 형성된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인간이 음악을 작곡하거나 영화를 찍음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감각을 주조해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신체·욕구만을 가진 동물로 치환하는 언술은 이토록 멋진 육감의 존재를 부정한다. 몇 년 전 나는 즉흥적으로 채식을 선언했는데, 그때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고기 안 먹으면 기력이 없어서 안 돼(엄마)”라거나 “고기는 본질적으로 풀때기보다 맛있다(친구)”와 같은 충고를 해주었다. 그것은 인간을 광합성을 위해 햇볕을 받는 나뭇잎이나 육식동물이므로 오색빛깔 공작새까지 잡아먹는 치타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말이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이유는 가족, 학교, 사회를 통해 고기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5). 생일날 외할머니가 담가준 갈비찜, 하교 길 친구와 사먹었던 닭꼬치, MT에서 맘에 둔 선배가 구워준 삼겹살 같은 것들. 이러한 기억이 축적되어 형성된 육감은 고기 맛에 대한 미각에 속속들이 스며있다. 따라서 육식을 단지 동물적 차원으로 해설하려는 시도는 아름다움의 핵심을 찾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인간을 순전히 욕구의 차원으로만 행위하는 자로 한정짓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순전히 즉물적인 감각만을 허락할 때, 복잡오묘한 실제의 경험이 축적되어 형성되는 인간의 미학이라는 가능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4. 뱀파이어 : 키스하는 입과 먹는 입


  뱀파이어는 어떻게 키스하는가? 입이 감각을 인지하는 방식은 여타 신체기관과 상이하다. 시각, 청각, 촉각과 달리 미각은 대상을 “먹음”으로써 작동한다. 음식들은 입안으로 들어가 으깨어지고, 짓무르고, 마침내 완전히 소멸된다. 이렇게 먹는다는 것은 대상의 물성 자체를 변형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키스는 연인의 육체 자체를 변형한다. 우리는 연인을 멀찍이 두고도 바라볼 수 있으며, 피부를 망가뜨리지 않고도 껴안을 수 있다. 그러나 키스하기 위해 우리는 연인의 입술과 가슴을 입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왈캉거리는 맨살을 누르고 빨고 깨물어야 한다. 그리고 뱀파이어에겐 두 개의 송곳니와 왕성한 흡혈욕이 있다. 뱀파이어와 키스하기 위해 새하얀 목덜미를 내어줄 때, 우리는 언제나 물려 죽을 가능성까지를 생각해야 한다.


  육식산업을 벗어나 동물과 만날 때,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정부는 구제역 운운하며 소와 돼지 수천마리를 생매장했다. 자신에게 쓸모가 없어진 단 하나의 특성(고기)에 근거해서 동물의 전존재를 매몰(생매장)할 수 있다는 믿음. 올해 장마가 시작되자 매몰지 인근에선 시체 썩는 내가 진동했다. 고약한 가스로 화한 수천마리 소와 돼지들은 이렇게 인간을 위협한다. 인간의 이성은 정치경제적 논리를 들먹이며 동물을 간단히 살해했으나, 인간의 몸은 동물의 몸에 접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멸균 표장된 삼겹살이 아니라 끈끈한 침을 분비하는 멧돼지와 맞닥뜨렸을 때 줄줄 흐르는 식은 땀. 타자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인간 본인의 정체성도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껏 당연하게 여겨온 방식으로는 상대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사고할 수가 없다. 공장식 영농을 유지하는 일이 온당한지, 혹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한 생명의 마지막을 점지하는 것이 가능한지가 물음에 부쳐진다. 육식산업의 안전망이 무너져 내린 여기 위험천만한 공간에서 동물과 맞닥뜨릴 때, 인간은 스스로를 단순히 이성을 가진 신이나 육체를 가진 동물 중 하나로 치환할 수 없다. 인간은 동물의 살에서 흘러나온 지하수를 마시며, 동물의 눈에서 번지는 피에 벌벌 떨고 있다. 신이자 동물이며, 정신이자 육체인 저 간극. 이 사이에서 나와 다른 존재를 제거하지 않으며, 기꺼이 차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나 자신조차 바꾸어내겠다는 의지. 이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전제이다.


  프란체스카가 두일이를 문 이유는 “배고파서”였다. 그러나 그건 “500년의 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내가 채식을 시작한 이유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인과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생일날엔 갈비찜을 차려냈다. 뱀파이어와의 키스, 연인과의 사랑, 그러니까 위험천만한 저 입술을 기꺼이 내 한 입 가득 담아내고자 하는 의지. 그러한 마음으로 상상해보는 동물, 그러니까 고기가 아닌 존재로서 동물, 고기 맛이 아닌 감각으로 인지하는 동물. 이 글의 어떤 문장에도 나는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오늘도 노트북 화면에선 <안녕 프란체스카>가 상영될 예정이다. 뱀파이어 로맨스의 환상이 펼쳐지는 그 곳에서 모두의 사랑과 죽음이 떳떳하길 바란다.



1) 물론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을 수 있다. 마녀사냥, 한국전쟁, 살인정권과 같은 잔혹한 국면에서 인간은 누구보다 야만적인 식인종이다. 그러나 폭력을 저지르는 주권자들을 이 땅의 생명체에 포함시키고 싶지는 않다.

2) <렛 미 인> 같이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아름다운 영화들, <트와일라잇> 같은 장대한 소설들, 올해 모든 한국인이 언급했을 배우 이지아는 ‘뱀파이어 로맨스’라는 노래를 불렀다.

3) 존 쿳시, 왕은철 옮김,『엘리자베스 코스텔로』

4) 네이버 백과사전

5) 물론 그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다 해도 고기는 맛있을 것이다. 고기는 확실히 맛있다. 그러나 지금의 고기 권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고기를 원하는 욕망은 단지 신체적 차원의 욕구가 아니라, 그보다 더 심오한 차원의 기억들과 연루되어 형성된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2011/12/04 14:03 2011/12/04 14:03
windycorne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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