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카카오톡을 탓하기만 할 겁니까?
-카카오톡과 관련된 지극히 사적인 성찰
리미_나는 긍정계의 여자 노홍철. 그저 히히 웃지요.
나의 지위는 지난 달(5월) 갤럭시2와 노예계약을 맺으면서 스마트폰 유저로 격상되었다. 드넓은 우주의 행성들처럼 암흑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주길 기다리는 수많은 앱 중에 내가 매료된 앱은 단연 카카오톡(이하 카톡)이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문자 500건을 제공하는 부가요금제에 가입했음에도 문자이용료에 허덕거렸던 나로서는 이 앱이 구원처럼 여겨졌다. 최근 사용자가 1500만 명을 넘어서며 하루 4억 건을 넘는 메시지를 성실히 배달해주고 있는 카톡은 기존의 문자 메시지를 대체하는 명실상부 대표적인 커뮤니케이션 앱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카톡 사용자가 아니면 일절 문자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기어코 하고야만 오만한 나에게 어느 날 문득, 마치 계시처럼, 카톡에 대한 비극적인 깨우침이 찾아온다. 그것은 카톡을 사용함으로 인해 초래된 내 삶의 은근한 변화, 쓸쓸한 착각을 알아차린 동시에 일어났다.
1. 은근한 변화: 말이란 너무 쉬워 나는 참지 못한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경제적인 영역 안에 있다. 카톡에서의 메시지 전송을 포함한 모든 서비스는 무료다. 이것은 통신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전환에 다름없다. 전화기가 상용화되고 인터넷의 보편적 접근이 가능해진 변화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통신사가 제공하던 문자 메시지는 건당 20원. 돈 때문에 사소한 무언가를 포기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쩌면 이 요금에 코웃음을 칠 지 모른다. 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의외로 우리의 일상에서는 문자를 통해 말해야 할 것이 갈수록 불어난다(혹은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점차 그런 인간으로 변모한다). 아직은 어색한 그의 옆구리를 넌지시 찔러볼 때, 거절의 순간에 민망함을 피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낯 뜨거운(혹은 귀 따가운) 말을 은밀히 배설하고 싶을 때, 기타 등등. 이 같은 욕구를 문자를 통해 충족시킬 때마다 핸드폰 요금은 계좌 잔고를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 그 때는 20원을 아끼기 위해 제한된 80바이트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알뜰히 담으려 말을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다듬어보는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카톡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카톡이 제공하는 무료 메시지 전송은 돈에 대한 걱정과 문자의 내용에 대한 고민을 날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이것들과 함께 폐기처분 해버린 건 바로 참을성이었다. 청구요금 0인 메시지에서 나의 말들은 양의 편집에서 자유로워 졌다. 그러자 내 말言은 고삐 풀린 말馬처럼 질적 검열도 없이 마구 내달렸다.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말들의 범람! 또한 할 말을 하나의 문자에 담기보다 단발적인 호흡으로 나누어 보내게 되었다. 나는 내 말이 한 문자에 꽉 담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이래로 문자를 입력하는 시간조차 지루하게 느끼게 되어 버렸다. 이윽고 상대방의 문자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응?’, ‘빨리’, ‘어서’, 독촉의 말이 대화의 많은 부분을 점령해갔다. 나는 지난 대화의 흔적을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말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 인가.
2. 쓸쓸한 착각: 너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이 착각은 순전히 카톡의 시각적인 눈속임에서 시작된다. 카톡에서 주고받는 문자들을 우리는 대화라고 간단히 부른다. 그것은 카톡이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채팅으로 내세우며 추구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톡의 화면 구성에서부터 ‘나가기’, ‘그룹 채팅’, ‘대화 저장’ 등의 기능까지 채팅방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되면 카톡을 무료 문자 메시지 앱이라고 하기보다 핸드폰용 메신저라고 규정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상의 흔한 메신저가 핸드폰으로도 가능하게 되었을 때 나의 은밀한 착각은 더욱 강력해지고 말았다.
채팅방은 온라인상에 손쉽게 만들어지고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는 새로운 가상공간이다.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비록 가상의 공간일 지라도, 동 시간에 동일한 곳을 점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현실에서 상대방의 물리적 위치는 변하지 않는데 단지 가상의 공간에서는 그가 입장하거나 퇴장하는 것만으로 그와의 심리적인 거리감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카톡은 이런 공존감을 컴퓨터라는 제한된 매체에서 우리 손 안의 작은 핸드폰으로까지 끌어내렸다. 이 사태의 위험성을 발견해낼 수 있는 단서는 바로 매체의 차이에 있다. 컴퓨터의 메신저는 장소, 통신, 부피 등의 문제가 초래하는 접속의 한계-번거로움-가 엄연히 존재한다. 온라인에서 우리는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 채팅방에 접속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다른 경로를 통해 재촉해야 한다. 그러나 휴대폰은 다르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 기계를 휴대한다. 그러므로 카톡의 친구들은 언제나 접속 상대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카톡을 실행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들의 폰에 깔려있는 한 그들은 언제나 나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대답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네가 언제나 거기 있다는 착각을 갖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슬픈 착각일 수밖에 없다.
3. 뻔뻔한 책임 전가: 이건 다 카톡 때문이야.
은근한 변화와 쓸쓸한 착각의 비극. 사실 이 비극은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바 있고 공공연히 경계되어 왔던 문제다. 인간이 진화(정말?)하고 문명이 진보(정말?)하면서 세상의 말들은 무게를 잃어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왕성한 번식력으로 세계를 점령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말들이 타인과 나의 세계를 잇는 가교로 작용해줄 것이라 우리는 감히 기대를 걸어보지만, 글쎄. 우리가 기대하는 효과는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일어난다.
그렇다면 21세기의 가장 보편적인 문제를 말하며 굳이 카톡을 들먹이는 이유? 별 거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열 올리며 주장하는 폐해들은 결국 내가 만들어 낸 사적인 것들임을. 카톡의 모든 사용자가 나처럼 성급해지고 착각에 빠지진 않으니까. 취업에 좌절하고, 사랑이 쫑나고, 여드름이 솟아나는,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나, 내가 한 몫을 해낸 비극. 그렇지만 어쩌랴. 이 비극은 내가 카톡을 폰에서 지우는 순간까지 나와 동거하게 될 텐데. 너에게 잊혀지지 않기 위해 어떤 말이든 하고픈 욕망과 네가 여기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버릴 수 없는 한 나는 말 못하는 카톡의 멱살을 잡을 수밖에 없다. 나와 닮은 욕망과 바람을 갖고 있는 익명의 그대들도 조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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