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을 수 없는 날들에 대한 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본 문학교육에 관하여
글_ 세렝
세렝_ 학교에서 업무요청서류를 만들다
가끔 뭔가 생각난 듯 시를 쓴다.
seize the day!
현재를 즐기라는, 간단하지만 선뜻 와 닿지 않는 이 말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중요한 화두다. 영화의 초반부터 따라가다 보면 키팅 선생이 실현하고자 하는 문학교육이란 것은 생의 아름다움이나 서정시처럼 낭만적인 생의 측면에 대해서, 그 부드러운 질감에 대해서만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인다. 정말 그렇다면 문학은 의외로 단순한 학문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것들이 엘리트적 삶을 따르는 어린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흔들 수 있었을까. 지금 이 ‘흔든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한 때나 가능한 치기란 말인가.
진취적이라 믿고 있지만 결국 그것이 편향되고 획일화되었다는 자각은 키팅 선생의 수업을 통해, 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시즈 더 데이’, ‘카르페 디엠’ 등 그들은 잠언과 같은 말들로 감화된다. ‘다름’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과정은 그들을 감싸고 있던 어색한 공기를, 굳은 미소를 유연하게 만든다. 영화의 이러한 흐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희열까지 느끼게 한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문학’이었기 때문이란 말을 하고자함이 아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잘 따라가다 보면 문학을 교육하고 받아들이는 자들 간의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렇듯 모든 교육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 가능했던 것은 ‘공감’이 아닌, 그들의 ‘투쟁’때문이었다. 학생들은 왜 ‘투쟁’까지 해가며 자신의 것을 지켜야만 했을까하는 물음이 생긴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한 수재는 그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에 빠져 권총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영화 속 분위기가 전환되는 대목이다. 친구의 권총자살을 통해 키팅선생을 따랐던 학생들은 혼란에 빠진다. 교장은 그 학생들을 협박하며 키팅선생을 제명시키려 한다. 언뜻 보면, 영화의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워’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키팅선생의 문학수업만이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억측이다.
키팅 선생의 강의를 듣기 전 학생들, 그들 또한 그 안에서 나름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욕망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어지러운 질서를 감당해내야만 살아남는 잔인한 게임 속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전능한 답안이 있었고, 그로인해 자만했으며, 결국 좌절했다. 그들의 삶은 가짜 기름을 넣은 신형 자동차처럼 보였다. 우스꽝스럽기만 했던 그들의 모습이 키팅 선생의 ‘자연스러운’ 문학 교육을 통해 어떻게 되었는가. 그 ‘문학교육’은 그들에게 투쟁 의지를 갖게 했다. 떠밀려서 하는 분투가 아닌 진짜 싸움이 그들 나름의 해석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일들의 원인이 왜 하필 ‘키팅선생의 문학수업’이 되어야 하며, 그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을 묻는다면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마치 문학교육이 피교육자를 움직일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그려놓고 있다. 이 영화 또한 키팅선생의 수업방식, 더 나아가 키팅선생이 행한 ‘문학교육’을 탓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오 마이 캡틴’을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배치시키며 이 모순을 교묘하게 피해가려 한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아무 투쟁의지 없이 떠나고야 마는 키팅선생은 또 뭔가.
물론 문학교육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수학이나 과학 등과 비교했을 때 문학이란 학문에 대한 선입견은 조금 다를 줄로 안다. 주관적이라거나 감상적이게 만든다거나, 정답도 없고, 다른 것들보다 더 답답하다거나, 어쨌거나 좀 다르다거나…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상태로써의 선입견일 뿐이다. 왜 그러한지 정확히 말해오지 않았다는 탓이 클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낸 ‘문학’이 과하다는 느낌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이 더 컸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문학교육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문학교육을 왜 하는지를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줄로 안다. 문학 장르 중 소설과 같은 경우, 인간의 무질서한 경험을 활자화시킴으로써 그 경험을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어 준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경험이란 순간적인 것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라든가 ‘과거’의 파편이 된다. 경험자체가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하기 전에 이미 그것들은 ‘파편’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소설은 이러한 파편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 하나의 의미로 전환시키는 문학적 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때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시나 소설은 허구적인 것이 가미된 상태로 탄생하며 그 허구적 장치를 독자 또한 개념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허구적 장치의 개념을 전제로 작품을 접한다. 작품의 허구는 결국 작가와 독자의 합의로 인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문학교육은 이 암묵적 합의를 돕는 징검다리가 된다. 작가가 나름의 작품을 내도 그것을 또 나름의 것으로 만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의 독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작품의 의미는 곧 퇴색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문학교육은 이러한 문학작품을 읽어내는 힘을 기르고 ‘나름의 해석’을 동반할 줄 아는 고급독자를 만드는 일에 긍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문학은 어떤 장르이건 간에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인간이 영위하는 삶과도 연결된다. 문학교육을 통해 여러 장르의 문학작품을 접하고 삶의 조건을 탐색해 보는 것은 또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 것인가. 그로 인해 사회적 삶에 눈 뜨게 되고 비판적 사고를 갖게 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문학교육이란 대상을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창조해내는 능력을 이끌어내는 일이며, 더 나아가 고정적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아마 키팅선생도 문학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새로운 시각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배우의 꿈을 꾸던 학생의 권총자살이 키팅선생의 문학교육과 연관되면서 학생들 간의 분열, 학교 측의 억지가 크게 불편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과연 키팅선생의 문학교육이 과했는가? 게다가 댁 문학왜 키팅선생의 문학교육에 특별함을 과시하듯 보여줬는가. 시를 재단한 이론서를 찢거나 걷는 연습, 단상에 올라 시를 읊는 갖출은 어떤 행위에 불과하다. 그 행위 자체가 대단하다기 보다 하지 않던 것을 했거나, 머릿속에 있는 것을 실제로 해봤기 때문에 단지 생소했을 뿐이다. 그것이 학생들의 동요를 일으켰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비극으로만 치닫는 스토리 전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심정이었다. 왜 그런가.
이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포커스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히려 초점이 맞춰줘야 했던 부분은 기계로 찍어내 듯 교육에도 정도(正道)가 있다는 의식 속에서 사는 ‘그들’과 ‘진정한 문학’을 가르치는 키팅선생 간의 싸움이 되었어야 한다. 어째서 키팅선생은 자신을 향한 부당함 앞에서 조용히 물러나야 했는가. 키팅선생이 홀로 방에 앉아있는 장면을 통해 그 또한 학생의 죽음 앞에서 자책을 하는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치 그것이 진짜 자신의 교육 방법 탓이라 여긴다면 이보다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학생이 배우가 되기를 지지했을 뿐이다. 그의 수업을 보석처럼 여겼던 학생들은 이후 일탈을 즐겼으나 공부를 게을리 했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풍요로워보였고 그 또래가 그러하듯 아슬아슬 해보였다.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방침만을 내세운 독단과 독선, 편협함 앞에 힘없는 척 돌아선 키팅선생의 꼴은 초반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우습다. 영화는 키팅선생의 캐릭터를 희미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캡틴 마이 캡틴이라니.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으나 그것을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한 탓에 키팅선생은, 문학교육은 한 순간에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
Trackback URL : http://nabulnabul.com/trackback/33
-
세렝 [잡을 수 없는 날들에 대한 꿈] feedback - (나불나불 1st)
Tracked from layz님의 이글루 2010/02/15 19:56
세렝님의 글은 이번 나불나불 창간호에서 제일 재미있게 읽은 글이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영화의 문학교육에 대한 태도를 오히려 문학의 본질이라는 생각지 못한 측면에서 비판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키팅 선생의 캐릭터와 그의 '진정한 문학'을 마냥 두근거리는 눈길로 바라보았던 나로서는 아주 새로운 시각이었다.세렝님의 비판은 기본적...
01_02_세렝_잡을수없는날들에대한꿈.pdf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